p.00
『순수와 위험』에서 더글러스는 더러움을 자리place에 대한 관념과 연결시켰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발은 그 자체로 더럽지 않지만 식탁 위에 두기에는 더럽다. 음식이 그 자체로 더러운 건 아니지만, 밥그릇을 침실에 두거나 음식을 옷에 흘리면 더럽다. 마찬가지로 목욕 도구를 옷장에 두거나 옷을 의자에 걸어두는 것, 집 밖에서 쓰는 물건을 실내에 두는 것, 위층의 물건을 아래층에 두는 것, 겉옷이 있어야 할 자리나 속옷이 나오 있는 것 등은 더럽다.”
더글러스의 통찰은 동물이나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집 밖에서 키우는 돼지나 오리가 집 안에 들어오면 더럽다. 마찬가지로 흑인이 백인 전용 구역에 들어가거나, 여자가 남성을 위한 공간에 들어가는 것은 더럽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더러움이 단지 자리의 이탈에서 비롯되는 혼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흑인 전용 구역에 들어간 백인은 자신이 오염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느낀다. 반면에 백인 전용 구역에 들어간 흑인은 그 자신이 오염원이다. 이는 더러움과 오염의 관념을 단순히 “체계적인 질서화와 분류의 부산물”로 간주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p.00
한편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오염의 메타포는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이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음을 함의한다. ‘더럽다’는 말은 죽일 수도 길들일 수도 없는 타자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을 담고 있다. 그 말은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정이 굳이 필요했음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주체성을 역설적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더러운 년’이라는 욕을 들어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런 말을 듣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p.00
우리는 얼굴face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사람이 된다. 하지만 이 얼굴은 우리 몸의 일부도 아니고, 영혼의 반영도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얼굴이 있는 듯이 행동하고, 우리의 얼굴에 대해 존중을 요구함으로써 얼굴이 실제로 거기 있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상대방의 사람 연기에 호응하고, 그의 얼굴에 경의를 표시하며, 그가 얼굴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p.00
여기서 얼굴과 가면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두기로 하자. 인격과 성격을 구별하듯이 우리는 이 둘을 구별해야 한다. 가면이 우리가 연기하고자 하는 성격과 관련된다면, 얼굴은 그 가면의 배후에 있다고 여겨지는, 연기자로서의 우리의 주체성과 관련된다. 나는 지금 가면의 뒤에 연기되지 않은 진짜 자기가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연기하며, 심지어 일기를 쓸 때도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우리 자신이 어떠한지 결코 알 수 없다. 가면의 뒤에 —즉 얼굴의 자리에—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내면성이 아니라, 신성한 것the sacred 또는 명예이다.